"노조탄압 막아줘요" "종교에 빠진 딸 도와줘요"..1인 시위 '성지' 가보니
홍상지
입력 2017.06.15. 06:46
수정 2017.06.15. 06:52
14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을 한 바퀴 도는 데 총 3시간이 걸렸다. 정확히 시계 방향 순서대로
이곳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사람 한 명 한 명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었다. 사연은 제각각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늘
한 점 없는 초여름의 따가운 햇빛 아래서 이들은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이따금씩 단체로 온 중국인 관광객들이 1인 시위자들
사이에 서서 청와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14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이 1인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청와대를 보기 위해 모인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홍상지 기자
분수대 광장 현장 경비를 맡고 있는 202 경비단 관계자는 "하루에 보통 30~40명의 1인 시위를 하기 위해 광장을 찾는다. 전
정권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그만큼 분수대 광장은 수도권 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1인 시위를 하기 위해
모이는 '메카'가 됐다. 이들은 "다른 정부는 몰라도 문재인 정부는 왠지 우리의 이야기를 더 잘 들어줄 것 같은 믿음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분수대 광장으로 온 1인 시위자들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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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비정규직·노조탄압 막아주세요."
기아차 화성공장 비정규직 조합원인 조정우씨. 홍상지 기자
광장에서 제일 처음 만난 이는 조정우씨였다.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사내하청 형태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조씨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기아차 비정규직지회 소속 조합원들과 함께 지난 7일부터 돌아가면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조씨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기 위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사내하청 노동자 고용은 불법 파견이라는 법원의 잇따른 판결에도 환경은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OO원예농협 조합장을 규탄하는 1인시위를 진행 중인 한순희씨. 홍상지 기자
전국협동조합노조 OO원예농협지회 한순희 교육국장은 "OO원예농협 조합장이 부부 사원 중 여성 직원의 퇴사를 강요하고 노조 직원들에게는 부당한 업무를 지시하는 등 직원들을 탄압했다"고 주장하며 조합장 퇴진을 요구하고 있었다.
14일 인천 송도에서 온 박회현 만도헬라일렉트로닉스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홍상지 기자
박회현씨는
지난 2월 노동조합을 결성한 인천 송도 소재 '만도헬라일렉트로닉스' 비정규직 지회 소속 조합원이다. 박씨는 "12시간 주야
맞교대 근무 시스템에, 불안정한 고용 상태까지 더해져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궁극적으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바라지만,
그전에 정규직과의 임금 차이만이라도 줄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견
조선회사인 성동조선 소속 노조원도 광장으로 나와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는 "'대마불사'라는 이유로 대우조선 등 대형 조선
회사에는 공적 자금이 계속해서 투입되고 있지만 중소형 조선 회사들은 구조조정 없이는 은행의 선수금 환급보증조차 받기 힘든 처지라
답이 없다"며 답답해 했다.
14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조선회사 소속 노조원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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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지역 사회 문제도 귀 기울여 주세요."
'슈퍼 우박' 피해 보상을 촉구하기 위해 경북 봉화에서 올라온 임진영씨. 홍상지 기자
경북 봉화에서 올라온 임진영씨는 청와대를 지척에 두고 4일째 단식 중이었다. 이달 초 경북 봉화군에 떨어진 우박으로 큰 피해를
봤다는 임씨는 "주먹만한 우박으로 농장이 다 쑥대밭이 됐는데도 '우박'은 태풍이나 지진과 달리 관련법에 보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지원이나 보상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당장 18일까지 뭐라도 심지 않으면 농사꾼들 다 길거리에 앉게 생겼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긴급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인데 관련 조례는 대통령만이 바꿀 수 있다고 해 지난 주말에 올라왔다"고 말했다.
14일 경기도 수원에서 온 김삼용씨. 홍상지 기자
경기도 수원 금곡동 주민인 김삼용씨는 시가 수원 칠보산에 지으려는 화장장 건립에 반대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김씨는 "칠보산은
주민들이 운동이나 산책을 하는 곳인데 시가 화장장 건립을 강행하려 한다. 이곳에 화장장을 짓게 되면 주민들의 삶은 그대로 무너지게
된다"고 호소했다.
14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1인 시위 중인 이정직씨. 홍상지 기자
경기도 포천시에서 온 이정직씨는 미8군 종합사격장인 로드리게스 사격장의 폐쇄를 촉구했다. 이씨는 "사격장에서 밤이고 낮이고 포
사격 소리가 들려 가까이 사는 주민들이 잠을 못자고 있다. 집 앞에 탄환이 떨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해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격장을 폐쇄하든, 아니면 주민들의 주거지를 나라가 옮겨주든 해서라도 이 문제를 정부가 좀 해결해줬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14일 충북 충주에서 온 조명자씨가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충북 충주에서 온 조명자씨는 매일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6시30분까지 피켓이나 현수막 대신 대형 스케치북을 들었다. '그런 걸
마련할 여유가 없어서'라고 했다. 10년 넘게 충북 충주의 한 임야에서 산양삼 재배를 하며 생계를 이어간 조씨는 "충주시의
기업도시 조성으로 8000만원의 보상금을 받고 땅을 내줬다. 그 땅에서 날 수 있는 산양삼으로 계산해보면 산양삼 5년근을 90원에
판 셈이다"고 주장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하다는 조씨는 함께 살던 가족과도 뿔뿔이 흩어졌다며 인터뷰 도중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14일 경기도 안양에서 온 송진희(55)씨가 "종교에 빠진 딸을 구해달라"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3년 전 딸이 특정 종교에 빠진 뒤 거의 '의절'을 했다는 송진희(55)씨도 열흘 넘게 매일 분수대 광장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송씨는 "지난 2월에는 딸이 아예 집에서 나가버렸다. 1인 시위를 하고 있으면 가끔 딸이 사람들을 데리고 나를 감시하러 온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에 종교실명제, 사교·포교 금지법, 유사종교 피해방지법 제정 등을 촉구했다.
14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구로 농지 강탈 사건'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1인 시위자. 홍상지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서울 구로수출산업단지 조성으로 농지를 정부에 빼앗겼다는 '구로공단 농지 강탈 사건' 피해자 유족들도 요즘
분수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14일 항의 피켓을 들고 서 있던 남성은 익명을 요구했다. 그는 "대법원이 원심만
인정하면 국가 배상이 이뤄질 텐데 지난 2~3년 간 이유 없이 판결이 지연돼 왔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법원 판결이 하루라도 빨리
진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14일 분수대 광장에서 세월호 사고 진상규명 촉구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자원봉사자. 홍상지 기자
3년 만에 바닷속에서 들어올려져 현재 선체 수색이 진행되고 있는 세월호 사고와 관련해서도 매일 자원봉사자들이 돌아가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날은 세월호 사고가 난 지 1156일째 되는 날이었다.
14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박정경수 녹색당원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최근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인 사드 문제도 1인 시위 주제로 빠지지 않았다. 자신을 녹색당원이라고 소개한
박정경수씨는 "사드 배치 논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한미정상회담 때까지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1인 시위를
계속 이어나갈 계획이다"고 말했다.
분수대 광장에는 글로 미처 다 풀 수 없을만큼 많은 풍경들이 있었다. '이런 것까지 과연 정부가 해결해줄 수 있을까'하는
문제까지 1인 시위자들은 한 톨의 희망을 안은 채 들고 나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었을 때에도 이 곳에 있었다는 한
시위자는 "분수대 광장 분위기는 전 정권 때에 비해 확실히 변했다. 예전에는 시위자 한 명에 경비대원 3명이 붙는 수준이었는데
그때보다 훨씬 분위기가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다른 시위자는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문 대통령이 다 해결해주진 않을 거다. 다들
바보가 아니다. 다만 '소통'을 강조해온 문 대통령이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주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광장에는 현수막과 피켓을 든 사람들이 수시로 오갔다. 풍경이 계속 바뀌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